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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빛/회의

[경남이야기 청소년탐방대] 11월 2일 탐방 후기 의령편 두 번째. 은행나무/곽재우의 생가/현고수와 북

탐방 후기 의령편 두 번째입니다. 특별히 의령편은 세 번째까지 있는데요. 의령편 세 번째에는 본 내용과 간략한 후기를 쓸 예정입니다. 일단 두 번째는 본격적으로 망우당 곽재우와 관련된 곳입니다. 곽재우의 생가를 중심으로 두 나무를 볼 것인데요. 두 나무다 노목이라서 기품과 신성이 느껴졌습니다. 뭐랄까. 언젠가 이 고고한 나무를 나의 글에 넣고 싶다? 뭐 이런 욕심이 생길정도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1. 은행나무

 


곽재우 생가에 들리기 전에 500년이 된 은행나무를 보았습니다. 가을이라 사방에 은행 나뭇잎과 은행이 떨어져 있어 울타리 넘어 나무 가까이로 가지 않았지만(제가 특~히 냄새가 민감하답니다.) 멀리 보는 것이 참 아름다운 나무였습니다. 하늘을 안을 만큼 넓고 크게 뻗은 나무 가지가 불안할 정도로 연약해보여서 존재하는 것도 참 신기한 오래된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 나무 남쪽가지에 두 개의 돌기(가지)가 있어 그것을 보고 산모들이 와서 젖이 잘 나오길 빌었다고 합니다. 젖이 잘 안 나올 때도 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돌기 하나가 없어져 한 개의 돌기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두 개가 남아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너무 커버린 자신의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은행나무입니다.

 

2. 곽재우의 생가

 


이번 의령편을 탐방하는 내내 이곳 공무원께서 설명을 도와주셨는데요. 특히 생가에 오자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유독 남명 조식과 곽재우의 연관에 대해서 말입니다. 곽재우의 업적이라면 대충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설명해주시는 분께선 그 업적 즉 전쟁 후의 곽재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일단은 탄생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곽재우는 우수하게 자랐으며 15살 때 남명의 제자가 되었고, 16살 때 남명의 외손녀와 결혼을 합니다. 그의 영민함을 남명이 높이 샀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 후 30대 초반에 과거에 급제했지만 선조(당시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옳은 소리였으나 단순히 선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내용의 글을 써서 관직에 오르지 못합니다. 물론 관직에 오르라는 권유가 많아 해보긴 하였으나 몇 달 못가고 사직했다고 합니다. 그도 남명과 같이 관직이 일찍이 질렀나 봅니다.

 

40세 초반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 활동을 합니다. 그는 그 활동을 위해 집안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전쟁이 끝나자 가문이 기울어집니다. 그런 그가 선택한 길은 은거였습니다. 그의 업적 덕분에 계속 내려주는 관직을 여러 번 사직한 끝에 유배를 가긴 했으나 그것이 무서워 못이기는 척 관직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름의 숭고함을 설명해주시는 분께서 유독 강조했습니다.

 

곽재우의 생애에서 벗어나 생가를 둘러보면 남명 조식의 생가와는 매우 다릅니다. 안채와 사랑채, 별채까지 완벽하게 있었고 관리도 잘 되고 있었습니다. 짤막하게 사랑채, 안채, 별채 등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동하였습니다.

 

3. 현고수와 북

 

현고수는 생가와 은행나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습니다. 현고수는 600년이 된 느티나무입니다. 한쪽가지가 부러져서 한쪽만 존재하고 있었는데요. 그 가지마저 부러질 염려가 있어 고정한 상태였습니다. 은행나무는 가까이 가서 살피지 않아 모르지만 이 나무는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나무는 오래되면 속이 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래된 나무를 그냥 막 베면 베고 있던 사람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 안에 있던 가스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지금은 그 안에 있는 가스를 모두 빼고 벤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현고수는 안 베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사적 가치가 상당하거든요. 그리고 아직 자라는 눈치라서 한 쪽 가지마저 부러질 염려가 있지만 그대로 두는 것이 멋있는 것 같습니다.

 

곽재우는 나무에 북을 매달고 치면서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의병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왜적에게 속수무책으로 죽느니 차라리 저항이라도 하자. 의병에 참가하면 죽든 살든 가족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의 재산이 다 탕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죠. 아니 그 만큼의 재산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 북을 매달았던 나무가 현고수입니다. 그러니 이 나무는 보존가치가 있는 것이죠.

 

현고수와 가까운 곳에 정자가 있는데요. 그 정자 안에는 다른 북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곽재우 장군이 북을 치며 의병을 모든 것을 기리기 위해 만든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북을 치며 의병을 모으던 곽재우의 입장이 되어보았습니다.

 

탐방 후기 의령편 두 번째 끝입니다. 세 번째와 짧은 소감문은 다음 글입니다.